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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生/보다 - 見

울산팸투어 02 -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내리기까지 - 언양성당



"언양성당의 역사는 천주교의 역사"


 조선 후기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군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화 군도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조선시대 공문서에 나온 말입니다.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 이 말은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으니 여러 명 모여 도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살기 위해 도적이 되어야 했던 불행한 시대였지요. 



 원인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왕조가 오래되면서 누적된 사회적 모순은 하나, 하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는 신분제가 그 하나입니다. 노력을 해봐야 평생 남의 집 노예 생활을 하기 힘들다면,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학자에서 시작해서 사회 곳곳으로 스며든 서학 "


 천주교는 이러한 시대에 빛과 같이 등장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동등하다는 가르침은 신앙이기도 하고 이념이기도 했습니다.초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학자들입니다.  당시 청나라와 외교북경에 갔던 연행사를 통해서 였지요. 북경의 유리창이란 서점가에서 신문물을 받아들이던 학자들이 산 책 중 천주교 관련 서적도 있었습니다.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며 "여유당전서"를 지은 다산 정약용, 김해에 유배되어 금관죽지사 등 당대 백성들의 실상을 섬세하게 그려낸 시인 이학규,, 당대 젊은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빠진 것은 이러한 연유였습니다. 이들을 시작으로 천주교는 솜에 물이 스며들듯 조선 곳곳으로 전파되어 나갔지요.  



 안타깝게도 이는 곧 탄압을 동반합니다. 조선은 유교국가였습니다. 성리학을 제외한 학문, 그것도 신분제를 부정하는 외국종교는 집권층의 동의를 받기 어려웠습니다. 조선 후기, 피를 부른 여러 박해들이 시작된 것이지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언양성당은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건물입니다. 또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물이기도 하지요. 천주교가 언양에 뿌리 내리기 위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지자들이 피로 자신의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언양성당의 역사는 바로 언양천주교의 역사이며,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내린 역사이기도 하지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 속에 숨어 옹기를 굽던 신도들 "


 언양성당 뒷편 산길은 바로 "성모 마리아 동굴"로 가는 길입니다. 그 옛날 언양의 신자들이 이곳에 비밀리에 모여 종교행사를 한 곳이라고 전합니다. 천주교인들은 더러는 산에 숨어 숮을 구웠고, 더러는 옹기를 구워 팔기도 했지요. 옹기 역시 이제 울산을 대표하는 특산물이 되었으니 신기한 기분이 듭니다.  



 잡힌 이들은 언양읍성에서 울산병영성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들이 처형된 곳은 병영성 앞, 동천 강변의 터였습니다. 지금은 울산병영 순교자 성당이 들어선 곳입니다. 이런 희생이 있은 다음에야 마침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언양에는 언양성당이 들어섰습니다. 




 언양성당은 고즈넉하고, 아름답습니다. 1936년 10월, 일제강점기 어려웠던 시절에 지어졌던 이 건물은 아직도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푼 두푼 성금을 거뒀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성당건립을 주도했던 에밀 보드팽 신부님을 기리기 위한 동상 역시 이곳에 서 있습니다.  



 맑은 공기가 그렇듯, 우리는 사라진 후에야 중요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 또한 그러합니다. 이 자유에는 그 옛날 울산, 언양의 천주교인들이 간절히 원했던 신앙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양성당을 돌아보며 그들의 희생을 추모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