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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生/보다 - 見

인도에서 가야까지,,,긴 여정을 마치고 잠든 허왕후릉을 찾아서


 



허왕후 묘소 전경

 


載厭緋帆茜旆輕 (재염비범천패경)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볍게,

乞靈遮莫海濤驚 (걸령차막해도경)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구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허왕후에 대한 기록 중 한 구절입니다. 배를 타고 가야로 온 항해에 대한 묘사이지요. 붉은 돛대 깃발도 가볍게 왔다 함은 허왕후가 배를 타고 금관가야에 온 것을 쓴 것입니다. 배의 운행은 날씨에 좌우 되지요. 아마도 선원들은 배의 무사항해를 빌었을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석탑은 파사석탑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왕후가 아직 왕후가 되기 전 동으로 가려 했지만, 수신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뱃길의 어려움 혹은 선원들의 두려움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요. 이에 당시 허황옥의 아버지는 파사석탑을 내려 싣고 가게 합니다. 파사석탑을 배에 실은 이후에야 배는 순조롭게 금관가야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할 수 있었지요. 허왕후 신행길의 시작인 것입니다.


 



 한국에는 많은 탑이 있지만, 그 유래가 기록에 남아 전하는 탑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절을 건립하면 그 탑도 같이 만들어지므로, 유래와 기원을 추정할 뿐이지요. 삼국유사에 그 유래가 전하는 탑인 파사석탑은 예외인 셈입니다. 인도에서 금관가야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항해하는 모든 이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탑은 지금은 허왕후의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파사석탑

 


 파사석탑을 배에 실은 후 바람은 순조롭게 분 연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종교의 힘이라 할 것이고, 혹자는 우연의 일치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신묘한 힘을 믿었다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이후 허황옥은 김수로왕을 만나 결혼한 후 허왕후가 됩니다. 탑과 함께 가야에는 불교가 전파됩니다. 허왕후의 형제인 장유화상은 수로왕의 명을 받아 김해에 명월사와 은하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에 전합니다.


 


 


 2천년의 세월 탓인지 파사석탑의 모양새는 이지러지고 부러져 있습니다. 7개의 돌을 쌓아 놓은 모습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석탑의 양식과도 많이 다릅니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썰을 때인 고려시대에는 파사석탑에 아직 조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며,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므로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묘한 조각을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세월을 탓합니다.


 



 이것으로 허왕후릉과 파사석탑을 둘러봤습니다. 옛 사람의 모습은 간 곳 없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지금도 김해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금관가야"의 상징인 쌍어문입니다. 쌍어문은 본래 허황옥의 출생지인 아유타국의 문장입니다. 멀리 동쪽으로 떠났던 허왕후의 여정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친 셈입니다.